탈취(奪翠)

탈취(奪翠) [1]-1

츠루사니, 츠루사니츠루

★기본적인 주의사항★
글의 내용과 등장하는 남사들의 성격·행동 방식은 원작과 무관합니다.
동인설정이 다수 나옵니다.
각종 취향타는 소재가 사용 될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기존에 풀었던 소재들이 다수 섞여있습니다.

★해당 연성의 주의사항★
각종 동인설정과 취향타는 요소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언급될 수 있습니다.
→주인공 트립·카미카쿠시·블랙남사·블랙혼마루·블랙사니와·블랙담당·블랙시간정부
혼마루 탈취·사니와 탈취·도해·강제 파괴 등
등장하는 일부 남사, 등장 인물들이 상당히 뒤틀려 있습니다.
동소체가 나옵니다.
성애 묘사가 나옵니다.
→해당 부분은 성인글로 작성 합니다.

※감금, 폭력, 약물, 동의 혹은 애정 없는 성관계, 가스라이팅 등의 비윤리적인 요소, 범죄적인 요소가 나오거나 언급됩니다.

트라우마가 있으신 경우 주의 바랍니다.

※작성자는 현실의 그러한 행위들을 절대 옹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말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밀어 열고 한 걸음 내딛던 순간, 때마침 지나가던 차에 반사된 햇빛 탓에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문을 지나고 나니 나는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서 있었다.

  내가 사는 세상은 그야말로 절절 끓는 중이었다. 절기로는 입추를 넘어섰는데 가을은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기온이 내려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치솟아 매일 폭염이 절정에 올랐으며 당연한듯 이어지는 열대야로 밤과 새벽마저 후덥지근하기 짝이 없다. 그야말로 찜통 속에 사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언젠가는 물러갈 계절이지만 그 끝이 여전히 아득하기만한 그런 여름날.
 그러니 나에게 닿아야 할 것은 숨이 막힐 정도로 뜨끈한 공기여야 했으며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보기만 해도 체감온도가 한층 더 올라가는 같은 번잡스러운 도시여야 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텔레비전의 채널이라도 돌린 것처럼.

 원래 더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무렵이 일년 중 가장 버티기 힘든 시기였지만 올해는 유독 무엇하나 수월하게 풀리는 것이 없어
쭉 지친 상태였다. 더위에 시달리며 잠못이루던 매일 밤 당장 어딘가로 떠나버리고 싶다고 생각 했었지만 이런 것은 단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열린 문 틈으로 스미던 후끈하고 불쾌한 공기는 온데간데 없이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살갗을 쓸고 지나갔다. 하늘은 시리도록 새파랬고 시야 끝에는 빽빽한 아파트 단지가 아닌 붓자국 같은 산등성이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둥그스름하게 잘 다듬어진 가로수와는 달리 삐죽삐죽 높게 자란 나무들은 저마다 알록달록하게 물들어 있었으며 시커먼 아스팔트 도로 대신 펼쳐진 푸른 호수 위에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만들어낸 금빛 물비늘이 가득했다. 차와 사람이 바쁘게 오가는 소리 역시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속이 그대로 들여다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 발치에서 찰싹거리고 억새들이 쉴새없이 바스락거리는 사이사이 이름모를 새소리가 끼어드는 그 풍경은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만 같은, 그야말로 무르익은 가을 그 자체였다.

 여기는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장소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현실의 어딘가에 실제하는 곳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시선 닿는 곳마다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어 감히 인간이 발디딜 수 있는 곳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풍광이었기에. 아마도 그래서였을거다.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어떻게 왔는지, 왜 왔는지 무엇하나 모르는 채였지만 이상하게도 난생 처음 겪는 이 원인 모를 일이 하나도 두렵지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홀려버린 것 같았다. 내가 처한 이 말도 안되는 상황과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전부 잊은 채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할 정도로 말이다.

 그때였다.

 "주인?"

 새 울음 사이로 불쑥 낯선 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사람이라고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곳인지라 나지막한 남자의 말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오는 조성 틈에서 유난히 도드라졌다.

 주인. 그는 그렇게 말했다. 직접적으로 나를 불렀다기 보다는 자기도 모르게 혼자 내뱉은 말에 가깝게 느껴졌지만 그 말이 지칭하고 있는 것이 나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평범하게 현대에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어지간해서는 직접 들어 볼 일 없는 호칭이 왜인지 설지가 않았다. 내가 그 말을 어디서 들어봤더라? 그보다 더 의아한 것은 겁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적 드문 곳에 혼자 있을 때 면식없는 남자와 마주쳤다면 일단 경계심부터 들어야 할텐데도 말이다. 상상치도 못한 일을 겪어 감각이 무뎌졌다보다. 나는 정말로 아무런 생각 없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타오르는 노을빛 아래, 붉게 물든 억새풀 위로 불쑥 솟은 인영은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온통 흰빛이었다. 걸친 옷은 물론이고 머리칼 마저 그러했다. 구름같이 새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은 인터넷에서 사진으로나 접한게 고작일 정도로 드문 빛깔이었으나 어쩐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또 그리 보는게 무례한 행동이라는걸 알면서도 좀처럼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쉽사리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생각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저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면 기억하지 못할리가 없을터다. 만난 적이 없는 것이 분명했으니 모를 수밖에. 하지만 어째서 알고 있는 이를 만난 기분이 드는걸까? 이상하게도 그가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내야 할 것 같았다.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난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더 그랬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남자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은빛 풀숲을 헤치며 외쳤다.

 "…주인!"

 그건 역시 나를 부르는게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거듭 소리쳤다.

 "주인!"

 이제야 알았다.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듣고 나서야 나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에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그럼에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었으니까. 반쯤 정지되어 있던 사고가 아예 멈춰버린 나는 간신히 한마디만을 내뱉을 수 있었다.

 "츠루마루……?"

 그는 분명히 츠루마루 쿠니나가였다. 입과 혀를 움직인다는 인식도 없이 그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듯 입술 사이로 샌 그 말은 분명 속삭임 같이 작고 작았을텐데 그는 억새를 스치며 달리는 와중에도 그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 가 더없이 환한 얼굴을 하는걸 보면 말이다.

"응, 나야!"

 그는 소리치듯 답하며 거의 날듯이 달려왔다. 그렇게 순식간에 도착한 츠루마루가 나를 덥썩 껴안았다.

 "…드디어 내 주인을 만났어."

 귓가에 떨어진 나직한 그 목소리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리고 나는 그야말로 바짝 얼어 붙었다. 차갑게 식은 몸에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도 얼굴에 닿은 포근한 옷자락과 은은하게 풍기는 기분 좋은 향기와 내 등에 둘러진 팔, 옷 위로 피부를 살짝 누르는 손가락의 촉감이 지나치게 생생해서였다. 바로 직전까지도 막연히 아주 실감나는 꿈을 꾸는게 아닐까 싶었었는데 나의 모든 감각은 지금 이 순간이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쉬이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여기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게 하나 더 필요했다. 사람들이 몽중이 아님을 확인하게 위해 제 몸을 꼬집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무언가 혼잣말을 해보곤 했었다. 내 귀로 내 목소리를 들을 때 스스로가 가장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였다. 아무런 말이어도 좋으니까 해보자. 이게 꿈이면 나는 잠꼬대를 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제풀에 놀라 깨어나겠지.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하지?

"……내 츠루마루?"

 …같은거? 라고 반쯤 장난에 가까운 그 말을 머릿속으로 생각만 한다는게 어느 틈에 입 밖에 내어버렸다. 그래도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으니. '내' 츠루마루라니. 정말로 아무말이나 해보자 싶었지만 그래도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려던것은 절대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부끄러움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착실히 느껴져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데 그가 작게 소리내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바로 주인의 츠루마루지. 어때, 놀랐어?"

 그렇게 말한 츠루마루가 팔을 풀고 한 걸음 물러나 그제야 나는 그를 가까이서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츠루마루는 정말로 행복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이 마치 해질녘 수면의 물비늘을 그대로 품은 것 같이 반짝여 나는 조금 전의 창피함도 모두 잊은채 시선을 마주했다. 정말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아름다워서, 평생토록 잊히지 않을 것 같은 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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